C'est la vie!
by Ni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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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와 향수
# 내가 집에 돌아왔을 때에도 녀석은 본 체 만 체. 짜증섞인 어조가 튀어나올 때까지 불러야 그제야 빼꼼히 방문 밖으로 고개를 내미는 녀석이다. 녀석은 부모님 댁에 있는지라 자취 시작하면서부터 얼굴 보기 힘들어진 게 사실이다. 뭐 게다가 이따금 몇 달 미국에 다녀오기도 하고 바쁜 일 있으면 매주 못 오기도 하고 그래서 그런지 사실 우리집 식구들 중에 나랑 가장 소원하다. 하지만 어쩌면 우리집에서 키우는 마지막 애완견이 될지도 모르는 녀석이기에 그에 대한 내 애정은 사실 좀 남다른 편이다. 

 고3 때 압구정에서 사탐 학원 다닐 때였던 것 같다. 이 녀석은 아니었지만 안락사 당한 잡종 치와와가 있었는데, 새벽에 수업이 끝나 집에 가는 차편이 모두 끊긴 시간 학원 근처로 날 데리러 오신 아버지와 함께 나온 녀석은 차창 밖으로 보이는 내 모습을 보자마자 반갑게 꼬리를 흔들었다. 내가 그렇게 괴롭히고 못살게 굴었는데도 습기 가득한 짜증스러운 늦여름 밤바람이 훅 하고 밀려 들어오는 차 안에서 녀석은 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에게 와락 안겼다. 피곤했던지 내 품에 안겨 쌔근쌔근 잠이 든 이 녀석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며 나는 녀석이 깨어나기라도 할까 애써 눈물을 참고 침을 꿀꺽 삼켰다. 

 아마 그 시점을 기준으로 더 이상 강아지를 괴롭히는 유아 같은 태도를 벗어버린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이 녀석은 그냥 나랑 별로 친하지가 않은 거지 - 부모님께 보이는 각별한 복종심을 보이지 않는다 - 그렇다고 나를 두려움의 대상으로 보지는 않는 듯 싶다. 녀석도 내가 집에 오면 나와 한 십 분 남짓 함께 놀아주는 성의도 보인다. 물론 그 시간이 지나면 자기도 제 갈 길을 가겠다며 이름을 부르는 나를 뿌리치고 쫄랑쫄랑 어디론가 가버린다. 여튼 이 친구와 내가 그렇게 함께 보내는 짧은 시간, 내가 가장 많이 하는 것은 바로 녀석과 눈을 맞추는 것이다. 말 한 마디 하지 못하는 강아지에게 나는 이런저런 질문을 던진다. 다롱아, 지금 무슨 생각하니? 넌 날 보면 무슨 생각이 드니? 오늘은 뭐 했어? 등등. 당연히 녀석이 내 말을 알아들을 리가 없다. 하지만 그래도 녀석은 내가 자기를 '나름대로' 애정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아는 듯, 잠자코 가만히 내가 제안한 놀이에 묵묵히 따라준다.

# 향수를 샀다. 하룻밤을 같이 하고는 더 이상 연락을 하지 않는 그 사람에게서 났던 바로 그 냄새다. 냄새를 기억하고 향수를 정확히 알아맞히는 놀라운 후각의 소유자? 그건 아니고 그 사람의 가방에 든 큼지막한 향수병에 쓰여진 상표명을 보았을 뿐이다. 하지만 브랜드 하나에서 나오는 향수 종류가 어디 하나던가, 향수 가게 점원이 시향하라고 주는 기다란 종이 조각에 킁킁거리며 코를 가져가 보고 몇 번이나 다시 맡아본 뒤에야 겨우 그 사람의 향을 찾아냈다. 

 그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 그에게서 풍겨 나오던 향이다. 엇, 냄새가 제법 좋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가 이렇게 다시는 연락을 하지 않고 지낼 거라 생각하지는 못했다. 그렇게 많이 기대했던 것도 아니었지만 이렇게 될 거라 예상한 것도 아니었다. 앞으로 이 사람을 만나면 이 냄새를 맡게 되겠구나, 이런 생각도 처음에는 잠깐 했었다. 그렇게 서로 연락하지 않은 상태가 며칠 지속되면서 자연스레 이 사람에 대한 기억은, 몇 시간밖에 되지 않는 그 짧은 시간의 잔상은, 아주 쉽게 증발해버렸다. 하지만 그가 뿌렸던 향수는 여전히 내 머릿속에 어떤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시각이나 청각은 그렇다고 해도 후각이 뇌리에서 재구성되어 추상화가 가능하다는 말은 들어본 적 없지만 왠지 그것은 잡힐 듯 말듯 묘한 잔향처럼 코끝을 맴돌았다.

 만족스러웠다. 이걸 사야 하나 말아야 하나 속으로 몇 번이나 망설였으면서도 현금을 내밀 때에는 의기양양한 척 했다. 점원은 서비스라며 테스터로 진열돼 있는 같은 향수를 휴대용 용기에 담아 주기까지 했다. 백화점을 나가자마자 목덜미에 향수를 칙칙 뿌리고 그 향기의 달콤함에, 이것을 다시 찾아냈다는 기쁨에, 조금 웃었다. 신종플루 때문에 이제는 어디 나갈 때마다 필수품처럼 얼굴에 쓰고 다니는 흰 마스크 덕에 아마 아무도 내 표정을 보지 못했겠지.

#집에 돌아와서 녀석을 불렀다. 녀석은 오늘도 느릿느릿 미적미적 아주 천천히 터벅터벅 나에게로 걸어온다. 그냥 왠지 기분이 좋아서 외투를 걸친 채로 침대 위에 녀석을 번쩍 안고 올라가 녀석에게 팔베개를 해주었다. 부드러운 손짓으로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오늘도 녀석의 눈을 보고 대화를 시도한다. 다롱아, 오랜만이야, 그치? 나 오늘 새로운 향수 뿌렸는데 냄새가 어때? 나쁘지 않지? 

 안 그래도 녀석은 벌떡 일어나더니 여기저기 킁킁거리고는 곧 내 목덜미에 코를 파묻는다. 과연 이 냄새를 좋아할는가, 개들한테는 너무 향기가 독하지 않으려나. 녀석이 어떤 행동을 보일지 궁금해서 나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코를 풀듯 힝 하고 콧방귀를 뀌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침대에서 홱 내려가 또 뭐가 그리 바쁜지 급히 방문을 나선다. 오늘도 뒤뚱뒤뚱 걸어가는 녀석의 뒷모습을 향해 짜증섞인 어조가 튀어나올 때까지 이놈 이름을 불러보지만 어디로 갔는지 대답도 없고 돌아오지도 않는다.

 나는 좋기만 하구만 뭘... 벌렁 드러누워 손목에 남아 있는 잔향을 몇 번이고 킁킁 맡고 있다가 부엌에서 들려오는, 어서 씻고 밥 먹으라는 소리에 웃옷을 벗고 무심코 거울 앞에 섰다. 그 향기에 도취된, 추운 날씨에 벌겋게 얼어버린 얼굴로 어딘가 열에 들뜬 한 남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나도 모르게 질문을 던진다. 넌 대체 뭐하는 놈이냐?

 쓴웃음을 지으며 한숨을 푹 내쉬는데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는지 녀석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방문 앞에서 나를 올려다보고 있다.
by Nick | 2009/11/24 22:23 | Communication | 트랙백 | 덧글(3)
왜 사람들은 글을 쓰는가
  “Why do some people write? Because they are too weak not to write.”

 오스트리아 출신 작가인 Karl Kraus는 저리 말했다. 영화 <해로운 우정 Les amitiés maléfiques>에서 접한 이 인용구는 배설물과 같은 사유로 언어를 함부로 범해 온 나에게 점점 더 큰 파문을 일으키는 중이다. 쓰지 않고서는 참을 수 없는 나약한 자아의 꼭두각시가 되어 잔혹한 동화 '빨간 구두'의 저주 받은 주인공처럼 키보드 위에서 시체처럼 춤추는 손가락들은 지금도 이 길을 잃은 무도에 심취해 있다. 도대체 왜 글을 써야 직성이 풀리는 것일까, 왜 쓰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것일까. 자판을 두드리는 일이 직접 펜을 손에 쥐고 종이에 써내려가는 일보다 훨씬 쉬워진 요즘 세상에 이 질문은 더욱 날카로운 비수로 다가온다. 글쓰기는 쉬워졌고 글의 양도 방대해졌지만 정작 글이라고 할 수 있는 글은 그만큼 희박해진 세상. 주변을 둘러보지 않고 비단 나 자신을 양심의 거울에 비춰 보기만 해도 이내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이고 만다. 그렇다, 나는 글을 쓰지 않기에는 너무나도 약한 존재이다.

 고등학생 시절 매일 같이 썼던 일기를 펼치면 마치 구역질나는 독한 향수 냄새가 진동을 하는 듯하다. 정신을 차리고 그 글들을 읽어보면 남는 것은 오직 공허함 뿐. 내 인생에 대한 싸구려 저널리즘에 가까운 그 일기는 그야말로 쓰레기였고 먹구름만 잔뜩 머금은 어두운 자의식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기계에 불과했다. 추억에 잠기는 것도 이제는 단 몇 초.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들을 7월 8일 맑음, 7월 9일 흐림, 7월 10일 갬, 이런 식으로 비스무레하게 찍어내는 행위는 그야말로 시간 낭비, 힘 낭비, 종이 낭비, 잉크 낭비, 그야말로 낭비의 극치였다. 하지만 이렇게나마 해소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쏟아낼 틀이 필요했던 것이었고 일기장은 그 배설물을 조용히 담아내는 공간이었던 셈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런 글은 쓰지 않는다, 그저 소모가 주가 되는 작업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이제는 다른 방법으로 배설의 욕구를 해결하고 아니면 그렇게 되기 전에 재빨리 날뛰는 감정의 고삐를 단단히 잡아붙든다.

 우리가 글을 쓰는 이유는 끊임없이 나의 존재를 스스로 확인하고자 하는 욕망에 기인한다. 그것은 나의 경우처럼 일종의 배설이기도 하고 다른 사람에게 스스로의 존재를 알리는 표현 과정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들 이전에 글쓰기란 먼저 자아를 재생산하는 과정이다. 다른 이들을 신경 쓰기 전에 내가 먼저 나를 확인하고 싶어하는 것이고 다양한 자아들로 나를 재구성하는 과정이다. 하지만 쓰기를 거부할 수 없을 만큼 약한 존재들에게 글쓰기란 결국 끝없는 사산(死產)의 과정이다. 우리의 글쓰기 과정이 생산이 아니라 배설이될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의 욕망이 나 하나의 복제에서 멈추기 때문이다. 결국 글쓰기를 거부할 줄 아는 이들이란 욕망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순간에도 이를 애써 삼키고 어떤 고통을 통해 출산을 유도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나는 어떠한가, 요즘의 글쓰기란 어떠한가. 배변 훈련이 제대로 안 된 어린아이, 시도때도 없이 자위하는 독방 속 고립된 한 인간의 모습이 아닐까. 말 그대로 아무데나 싸질러 놓는 글쓰기는 나약함 그 자체일는지도 모른다.

 때로 이런 글들이 외려 깔끔하지 못한 뒷맛을 남기고 자아를 병들게 한다는 사실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 게다. 모두가 절필할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하얀 모니터에 깜빡이는 커서를 쉴새없이 이리저리 움직이기 전에 한번 쯤은 내 욕망을 점검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이 욕망은 분명히 내면의 어떤 바탕에 의한 것이지만 알고 보면 자극은 궁극적으로 외부에서 온다. 그러기에 어쩌면 욕망을 글의 화자에게 투사시키기 전에 먼저 외부에 노출시킬 필요가 있다. 바깥바람을 쐬고 난 욕망은 분명 고립된 탁한 대기 속에 상주했던 원래의 모습과는 분명히 달라져 있을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사라질 수도 있고 예상치 못했던 모양으로 변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욕망을 수면 위로 드러낼 만큼의 강함을 우리가 갖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낭비하는 글쓰기를 거부하는 힘과 결국 맞닿아 있을 것이다.

 글쓰기는 분명 욕구를 해소하는 치유의 기능도 갖고 있다. 하지만 이 세상에 항상 약이 되는 것은 없다. 잘못된 치유는 중독으로,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 병으로 번질 수도 있다. 아마도 Karl Kraus는 그 고질적인 병을 나약함이라고 말하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모든 글이 출산의 고통을 겪으며 탄생될 필요는 없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겠다. 하지만 몇 번이고 퇴고하고 썼다 지우고 찢어버리고 다시 주워 삼키는 과정을 반복하며 욕망의 정수를 쏟아붓는 이들에게 고통없이 나온 글이란 그저 주검에 불과하다. 결국 쓰는 행위란 정교한 사유로 옷감을 짜 이를 펼쳐놓는 일이다. 외부와 소통하는 사유가 바탕이 되지 않고서는 글이 글이 될 수 없다. 즉, 약해서 글을 쓸 수밖에 없는 자들이 늘어놓는 글이란 깊이 있는 사유를 거부하는 나태함의 소치인 셈이다. 
by Nick | 2009/11/16 23:55 | Communication | 트랙백 | 덧글(2)
[영화] Happy Endings (2005)
 170분 동안 200문제를 풀어야 했던 오늘 오전. 결국 몇 문제는 건드려보지도 못하고 답안을 제출해야 했다. 예전 덕성여대 캠퍼스였다는 곳을 나서며 생각했다, 우리 학교도 이렇게 아기자기한 맛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시험 장소를 잘못 알고 헐레벌떡 집을 나서느라 밥숟갈 몇 술 뜨지도 못해 엄마에게 미안한 표정을 지었던 오늘 아침도 떠올려 본다. 배가 고파서 이리저리 먹을 곳을 찾다가 잘 알지도 못하는 낯선 골목길 안 작은 식당들을 기웃거리기도 했다. 그러다 결국 인사동까지 걸어가 제법 규모가 큰, 겉만 번드르르한 식당 안에 들어가 냉면을 한 그릇 시켰다. 맛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역시나 너무 달다. 얇아진 지갑을 어루만지며 한글 간판이 붙어 있는 스타벅스에 들어가 초콜렛 바를 하나 사서 씹어본다. 잿빛 하늘 아래, 인사동에 쏟아져나온 많은 외국인들 사이에서 마치 이방인인 양 한결 느린 걸음걸이로 거리를 누비기 시작한다.

 H 생각이 났던 건 사실 밥먹기 훨씬 전이었다. 11월 내내 야근이라는데 오늘도 당연히 출근했겠지? 그래도 주말인데 저녁에 같이 밥이나 먹을 수 있지는 않을까 싶어서 문자를 넣어 보았다. 시험이 생각보다 어렵네요, 유학 준비가 정말 만만치 않은 일이군요. 몇 분 지나지 않아 그에게 답장이 왔다. 수고했다는 짧은 몇 마디 인사와 80바이트 제한인 메시지에 빼곡히 적힌 영화 세 편. 그냥 그 문자를 보고 웃음이 나왔다. 이 바닥에서 흔하게 볼 수 있듯, 아무것도 아닌 관계로 흐지부지될 수도 있는데 이런 문자 메시지 보내는 걸 보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건 아닌가 보다, 하는 바보 같은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가 나에게 권하는 이 스트레스 해소 방식이라는 것도 왠지 나에게 기쁨을 준다.

 세 편의 영화 중 가장 먼저 구할 수 있었던 것은 Lisa Cudrow가 주연을 맡은 'Happy Endings.' H는 이것보다 다른 두 편을 더 추천했지만 그래도 이 영화가 내 기대를 저버리지 것이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시험이 끝나 누군가를 만나려고 안간힘을 써 봤지만 다들 애인도 생기고 결혼하는 지금 시점에서 나랑 갑작스럽게 주말 약속을 잡아줄 친구를 구하는 게 그리 쉽지만은 않다. 웹서핑으로 시간을 허비하느니 그의 선택을 믿고 따라보는 게 낫겠다 싶어 오늘은 제법 일찍 - 그래봐야 저녁 시간이지만 - 집으로 돌아온다.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한 Billy Joel의 'Just The Way You Are'을 들으며... 몇 번이고 다시 볼 필요가 있는 영화라 생각했다. 영화에 대한 직접적인 평은 그래서 아직 보류 상태. 그것은 아마 영화를 보고 H에 대한 생각을 지나치게 많이 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아니면 워낙 복잡하게 얽히고 섥힌 인물 관계 때문에 몇 번을 더 봐야 잘 드러나지 않는 복선들의 진수를 맛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것도 아니라면 제법 기발하고 독특한 엔딩 때문에 뭔가 아직 영화에 대한 생각이 정리가 덜 된 느낌이라 그럴 수도 있다. 아니면 뭐 정말, 영화를 소화하는 시간이 필요한 것일 수도 있고.

 하지만 이것만은 확실하다. 좋은 영화고 잘 만든 영화다. 영화 초반에 작가가 자막을 통해 "이 영화에서는 아무도 죽지 않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처럼 슬프지 않고 사람 참 기분 좋게 만든다. 인생이라는 것은 어떻게든 살아가기 마련이고 그렇게 퍼즐을 맞춰 나가는 과정에서 잠시 방황하는 것도 그렇게 나쁘지 않다는 것을, 영화는 말하고 있다. 어쩌면, 모든 것이 짜맞춰진 각본대로 진행되어도 성공할까 말까 하는 유학을 준비하는 입장에서 자꾸 초조해지고 조바심만 내는 나에게 참말로 적절한 영화가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인생이 어떻게 흘러가든 그것이 종국에는 모두 해피 엔딩을 맞을 수 있다는 게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해피 엔딩이라는 게 참말로 상투적이고 뻔한 결말이기는 하지만 정작 그 행복한 결말에 도달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게 아이러니다. 하지만 우연과 필연이 씨줄과 날줄처럼 얽힌 인생이라는 이 흥미로운 마술 보자기에서 툭 튀어나오는, 때로는 전혀 예기치 않은 때로는 기대와 딱 맞아떨어지는 사건들을 차곡차곡 쌓아놓다 보면 어느새 그 결말에 쉬이 도달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리고! 뭐 하나 잘못되었다고 나는 이제 망했네 하고 주저앉지 말고 지금 잘 나간다고 으시대며 기고만장하지 말라는 것. 최선을 다하되 주어진 결과는 받아들이고 다시 앞으로 나아가라는 것. 저장하기와 불러오기란 존재하지 않는 인생이라는 게임의 행복한 엔딩을 보기 위해 명심해야 할 것들이라 하겠다.

 이 영화 덕분에 나는 덤으로 H의 취향도 대략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정말이지 네트워크 이론이나 복잡계를 공부했어야 했다. 아참 - 지금 내가 쓸 문장은 조금 천천히 어절 단위로 읽어야 영화 제목과 같은 맛이 날 게다 - "그리고 나는 마음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게 되었다."
by Nick | 2009/11/08 01:17 | Impression | 트랙백 | 덧글(4)
control freak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나 쭉 생각해 보니 인생의 대부분이 무엇인가를 통제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데 허비됐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상황을 통제하고 어떤 인물을 통제하고 그래서 내것으로 만들고 내뜻대로 하고, 그게 재미가 있었나 보다. 어디가서 남들하고 잘 못 어울리는 것도 아니고, 비뚤어진 성격이라는 말도 별로 들어본 적 없는 나 같은 놈이 사실 알고 보면 더 음흉한 놈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렇다고 솜씨 좋게 누구 등쳐먹고 뒤통수 때리고 그러지도 못한다. 뭐 실속없이 스스로만 괴롭히는, 나는야 control freak.

 아마츄어이긴 하지만 10년 동안 거의 일년에 한번 무대에 오르면서 느끼는 것은 - 나는 메쏘드 액팅 같은 건 배워본 적도 없지만 - 배우들의 심리나 행동 묘사 같은 것도 아주 정교하게 잘 조작되고 통제될 수 있는 일종의 '물적 현상'이라는 것. 연출은 단 한번밖에 해본 적이 없지만 이런 생각은 연출을 하면서 더 쉽게 형상화되곤 했다, 배우들은 내 꼭두각시나 다름없었으니까 - 물론 연극에서 연출이 최고다, 이런 생각을 가진 건 아니지만 연출의 뜻에 따라 같은 연극이 전혀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 것은 자명한 사실.

 극에 등장하는 인물들이기는 하지만 이들이 실제로 무대에서 현실이 되어 나타날 때 - 물론 그들은 외운 대사를 읊는 것이기는 하지만 - 좀더 몰입하기 위해서는 분명 인물의 생각을 읽고 그가 왜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 행동하는지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결국 극작가가 원했던 방식 혹은 연출이 원하는 뜻대로 인물을 빚어낸다는 것은 그의 심리와 행동에 맞게 나의 그것을 다시 맞추고 조작해서 그의 생각과 거의 일치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적어도 극 안에서는.

 결국 이것은 마음이나 의식의 통제와도 관련이 있다. 과거에는 간혹가다 나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을 마주할 경우 글로 풀어 단순히 '해소'하는 수준에밖에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요즘에 들어서는 고장난 부품을 갈아끼우고 엉망이 되어버린 회로를 고치는 일처럼 마음의 어떤 부분을 내 의식이 고칠 수 있으리라,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나에 대한 완벽한 통제권을 획득하고자 한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쉬운 일은 아니다. 일단 이 문제는 남에게 어떻게 보이느냐의 일차적인 문제가 아니라 - 상황에 따라 적절한 마스크를 뒤집어 쓰는 데 능수능란한 사람이 될 수 있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 내가 나를 괴롭히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로 귀결되어야 한다. 그러기에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보인다.

 내 안의 부조리를 찾아내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잘못된 부분이 있을 때 그 자아를 벼랑 끝으로 몰고 가 밀어버리겠다는 것도 아니다. 그놈도 내 일부고 내 의식도 나의 일부다. 다 인정하고 대신 나를 좀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 그래서 좀더 큰 사람이 될 수 있으면 하는 것, 지금의 고통에서 해방되는 것이 내 인생의 목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야 대책없는 control freak. 
by Nick | 2009/11/04 09:38 | Communication | 트랙백 | 덧글(2)
[영화] Heights (2005)
 내가 H를 만난 것도 상당한 우연 축에 속한다. 나이 차는 제법 있지만 대학교 선배에다가 잘 하면 대학원 선배까지도 될 수 있는 그런 우연도 우연이지만, 처음에 서로에게 어느 정도 호감을 갖고 있었던 것도 대단한 우연 중의 우연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분당에서 그렇게 그 사람을 만나고 혼자 돌아오는 길에 나는 버스 대신 택시를 탈 수밖에 없었다. 가난한 대학원생 주머니 사정이야 어차피 뻔한데 버스 오래 기다리는 것도 싫었고 나는 그냥 빨리 어디로 피신하고 싶었다. 봉천동 모텔촌 한켠에 있는 내 방, 안락함이라고는 사실 찾아보기도 힘든 공간이지만 나는 피난처가 필요했다. 그렇게 바삐 집으로 돌아오고 나서 나는 한 동안 침대에 널부러져 있었다. 그러다 다시 집안일을 시작했다. 뭐 이걸로 인연이 끝은 아니지만 씁쓸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어차피 안 될 것, 굳이 뭐하러 만났나 싶기도 했고... 굳이 내가 그가 사는 분당까지 갈 필요는 없었는데 싶은 생각도 들었고. 다음 날 아침에는 다행히 긍정적인 사유로 마음에 불을 지폈지만 그것도 잠깐, 을씨년스러운 잿빛 하늘에 푸시시 소리를 내며 불씨는 잦아들고 말았다. 벌써 그게 몇 주 전이다.

 이 영화는 H가 추천해 준 영화다. 그의 말을 듣자마자 바로 DVD를 주문했다. 우리나라에서는 구할 수가 없어서 아마존에서 주문하는 수고를 들였다. 이번 주 초에 도착했는데 주중에는 어떻게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금요일 밤이었던 어제, 반복되는 외로운 주말이 싫어서 그냥 집으로 돌아와버린 어제. 마찬가지로 안락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공간이지만 두꺼운 이불 속에 폭 파묻혀 모니터 속 인물들에게 내 마음을 고스란히 내놓았다.

 뉴욕을 배경으로 하루 동안 일어난 얽히고 섥힌 인연의 기묘한 이야기가 흡입력 있게 전개됐다. 인물들의 감정이 만들어내는 화음에 이내 동화되어 시간가는 줄 몰랐을 정도였다. 쓸쓸한 내 요즘 심리 상태 때문에 더 잘 들어맞는다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외로웠다. 보는 내내 정말 외로웠다. 복잡한 이 세상에 밤과 낮이 반복되는 것처럼 모든 게 다 완성되었다 생각되는 시점에서 그것들은 너무나도 쉽게 무너져내렸고 눈앞이 막막해져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버린 상황에서도 인연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내 방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죽음과 삶, 만남과 이별이 반복되는 상황-영화는 마지막에 새로운 인연의 시작을 암시하며 제법 희망적인 열린 결말로 막을 내리지만, 나에게는 그것이 오히려 극심한 피로로 다가왔다. 회의감이라고 하는 게 더 맞을는지도. 왜 우리는 상처를 주고받으며 그렇게 연을 맺으려 하는 것인지 그것을 놓지 못하는지 스스로가 다 원망스러웠다. 아, 이 불완전한 존재여...

 힘들다. 외롭다. 피곤하다. 시작도 끝도 없는 뫼비우스의 띠 같은 인생. 하지만 나에겐 감사하게도 주어진 시간, 그 감당할 수 없는 자애로움에 오히려 깔려 죽을 것만 같은 그놈의 시간이 있기에 힘들어도 다시 일어나고 외로워도 웃고 피곤하면 잠으로 그 피로를 달래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하겠지. 연속적인 시간에 불연속적인 점들을 콕콕 찍으며,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by Nick | 2009/10/31 11:05 | Impression | 트랙백 | 덧글(3)
인연
 그게 참 어디에서 오는지 알 수 없고, 어느 곳에서 시작되는지 모르기 때문에 언제나 우리 가슴을 때로는 설레게 때로는 저미게 하는가 보다. '천리안' 같이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 아주 오래 전부터 탐탁지 않게 여긴 이유가 있다.

 나는 어떤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어떤 사람으로 살게 될까. 요즘 같이 밤공기가 청량한 시간 조용한 캠퍼스를 느릿느릿 거닐며 하는 생각이다. 구김살 없이 컸다고 할 만큼 평탄한 인생을 산 것도 굴곡이 많은 삶을 살아온 것도 아니지만 다행스럽게도 이런 생각의 끝에 언제나 스스로에게 푸근한 미소를 건넬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축복받은 일일 게다.

 인연에 대한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다. 골아픈 인연도 많았지만 사람이라는 동물이 간사해서 좋은 것만 기억하는지 그냥 나에게 웃음을 안겨 준 사람들에 대해 자연스레 떠올리게 된다. 대학에 들어 온 이후 이제 진정한 우정 따위는 절대로 빚어낼 수 없다고 포기했던 나. 그저 내 고민에 말끝마다 일체유심조를 읊조리는 한 후배 녀석의 함박웃음을 떠올리며 오늘도 이렇게 잠자리에 눕는다.

by Nick | 2009/10/31 00:43 | The Haven | 트랙백 | 덧글(2)
사진

 이전에 사진 강좌 들었을 때 전시를 위해 한 가지 주제로 거의 두 달 동안 사진을 찍었던 적이 있었다. 나는 빨간 종이, 파란 종이를 소재로 삼았다. 종이 두 장으로 그렇게 몇 시간이고 재미나게 이런저런 시도를 하며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사실에 나 스스로도 놀랐다. 사진작가 선생님께서 뒤풀이 때 말씀하시길 예술은 결국 유희에서 비롯되는 거라며 애착을 갖고 있는 대상을 다양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과정에서 좋은 작품 혹은 예술이 탄생할 수 있는 거 아니겠냐고 하셨다.

 나 같은 아마추어 중의 아마추어가 사진에 대해 무어라 말할 수 있겠냐마는 다른 사람들이 찍고자 하는 사진과-내 주변 사람들이라는 작은 풀을 이렇게 지칭할 수 있다면- 내가 원하는 사진은 조금 다른 듯 싶다. 정확한 용어가 있을 텐데 그냥 내 식대로 표현하자면-어떤 사람들은 보이는 광경에서 비롯되는 scene을 찍고 싶어하는데 나는 내가 만든 mise en scène을 찍고자 한다. 그래서 나에게는 '출사'라는 개념이 사실 낯설게만 느껴진다. 스튜디오 작업이 나에게 그렇게 매력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던 듯 싶다. 떠오르는 심상들을 직사각형 화면 안에 배치하는 일이 그렇게 흥미로울 수가 없다. 제대로 한번 우연히 떠오르는 심상을 스케치하고자 스토리보드처럼 생긴 특별한 노트도 샀다만 일단 유학 준비 때문에 모든 것이 보류 상태.

 사진기만 갖고 하루종일, 내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오브제들로 둘러싸인 방에서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사진을 찍고 싶다. 아니면 사진기 달랑 하나 들고 남들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곳을 마음껏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을 수 있으면 좋겠다. 

 베르토프의 <카메라를 든 사나이> 중 아직도 기억에 남는 장면은 카메라가 따뜻하게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피조물들을 내려다보는 모습이었다. 나는 거기서 왜 가슴이 뭉클했을까. 그것은 내가 카메라의 시선에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 시선의 온기에 스르륵 잠들고픈 피사체의 입장이었기 때문이었을까.
by Nick | 2009/10/23 15:41 | Perspective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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